이 동 화
공 적
6,10만세 사건은 항일투쟁사상 학생만으로 일으킨 첫 독립운동이었다. 구한말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 구한국의 종언을 고하게됨을 본 전국민이 쌓였던 울분을 참을 길 없던 중, 자주독립을 기본으로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으로 앙양되어 온 계산의 중앙고보생들은 국민의 대변자로 자처하여 정의와 의분으로 민족의 선봉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호창한 것이다. 이 운동의 모의는 통동과 사직동 두 곳에서 각각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5학년에 재학중이었던 李東煥(18회), 朴龍奎(18회) 교우는 통동에서, 그리고 5학년 李先鎬(18회), 4학년 柳冕熙(21회) 교우는 사직동에서 각각 거사를 준비했으며, 중동학교와 중앙기독교청년회 그리고 경성대학 예과 등의 학생들이 이에 동참하다. 그리하여 인산당일 돈화문에서 종로3가까지에 도열한 학생들을 통하여 10여만장의 격문과 태극기가 산포되었으며 주도학생들의 선창에 의해 「대한독립만세」가 열화처럼 울려 퍼졌다. 이에 당황한 왜경들은 기마대를 출동시켜 모교 재학생 백여명과 연전학생 7백 80명 및 기타 십여 명을 검거했으며, 만세운동을 사전에 눈치채고도 제지하지 않은 모교의 趙喆鎬 선생까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중앙학교의 학생회에서는 옥중의 학생들에게 보내는 위로금을 동아일보사에 기탁했으며, 변영태 선생을 비롯한 교직원들은 교과서와 교과 보충 인쇄물을 차입해서 옥중 학생들의 학업을 계속토록 하기도 했다. 6?10만세 운동은 이처럼 전 중앙교우들과 교직원들이 뜻과 힘을 한데 모았던 일대 운동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에도 이 운동을 거사하고 주동했던 李先鎬, 朴龍圭, 李東煥, 柳冕熙 등 4인 교우의 공적은 中央의 역사에 길이 빛나고도 남음이 있다.
학 력
경 력
상 훈
저 서